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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소개

연미당(延薇堂)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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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1-18 10:14 조회2,1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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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 07. 15 ~ 1981. 01. 01   만주 북간도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1930년 상해 한인여자청년동맹 임시위원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선전 및 홍보활동
    1943년 한국애국부인회 조직부장
    1944년 대적선전위원회를 통해 방송 및 초모공작 활동


임시정부를 지키며 독립의   토대를 마련한 여성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인 남편을 대신하여 실질적인 가장의 역할과 항일투쟁전선에 직겁 나선 독립운동가로서의 다중적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다.

한국 독립운동이 깊이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을수 있도록 봉헌한 헌신적인 독립운동가이다.


가장, 독립운동가로서의 삶


연미당 선생은 1908년 7월, 북간도 용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생의 부친 연병환은 1919년 3월 3일 북간도 청년들의 만세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하다 체포된 독립운동 지도자였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운영하던 인성학교에서 공부한 연미당 선생은 학교 졸업 후 청년 독립운동가 엄항섭 선생과 결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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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미당, 엄항섭 선생의 결혼식 (출처: 독립기념관) 


당시 독립운동가 남편을 둔 대다수 여성들이 그러했듯, 선생은 남편 엄항섭을 내조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과 상해여자청년동맹에서 맹활약하는데, 이는 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하고 그들의 역량을 결집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임시정부를 지키며 

한인들의 힘을 결집하다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키자 상하이에서는 한인 색출작업이 벌어집니다. 선생은 가족을 이끌고 상해를 탈출해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고난의 행군을 합니다. 그 와중에도 피습으로 부상을 입은 김구 선생 등 연로한 독립운동가들을 병간호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과 재건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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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임시정부 이동시기 정부요인과 가족 (출처: 독립기념관)


1940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에 정착하자 연미당 선생은 한인들의 힘을 결집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한국혁명여성창립동맹을 발족하고 애국부인회를 재건하여 재중 한인 여성들의 항일 정신과 독립의지를 고취시켰습니다. 더 나아가 일본군에 소속된 한인 사병들을 광복군으로 전향시키기 위한 반일 선전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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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 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따뜻한 가슴을 가진 독립운동가


연미당 선생은 광복 직후 바로 대한민국 땅으로 돌아오지 않고 귀국을 미룹니다. 중국에 남아있는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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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미당 선생


지칠 줄 모르는 투지로 독립운동의 토대를 다지고, 재중 한인들의 항일 의지를 독려한 연미당 선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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