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몰연도 : 1860.2.3. ~ 1910.9.23
○ 훈 격 : 건국훈장 애국장(1991년)
○ 공적개요
- 1895년 을미사변에 분개, 김복한 등과 홍주에서 의병 봉기
- 1910년 일제의 한국병탄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
○ 공적상세
"삼천리 강토가 원수 오랑캐의 땅이 되고 500년 예의의 나라가 변하여 오랑캐 나라가 되었으며 한나라의 임금이 갑자기 이적의 신민이 되었으니, 절조있는 선비로써 어찌 편안히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겠습니까. 이는 개와 돼지와 같은 것이고, 또한 매국한 무리들과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삶을 훔치겠습니까(이근주 선생의 유언) "
이근주선생은 나라를 잃은 통분에 자결하여 순국한 충남 홍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근주 선생입니다. 이근주 선생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일어난 홍주의병에 참여하였으며, 1910년 경술국치의 비보를 접하자 자결로 항거한 분입니다.
(1) 홍주의병 활동
1860년 2월 3일,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이근주 선생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일어난 홍주의병에 김복한, 안병찬 등과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1895년 12월 4일(음) 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하고 김복한 등 주도자 23명을 체포, 구금하였다. 이근주가 면천에 있는 백형의 집에 모친을 뵈러 간 사이였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의리는 의거(義擧)에 있는 바, 이 대사는 하나는 국모의 원수를 갚고, 둘은 단발의 수치를 갚는 것입니다.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의리상 홀로 도피할 수 없으니 자수를 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하며 홍주성에 들어가려 하였다.
▲ 1906년 5월 30, 31일 홍주성전투 중에
일본군에 의해 희생된 홍주의병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홍주의사총
(출처: 국가보훈처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홍주 소재)
그러나 김복한 등 주도자들이 체포된 뒤, 조의현 등과 재기를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때 울분에 쌓인 선생은 천식과 다리가 마비되는 병을 얻고 말았습니다.
▲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자결했던
민영환 선생의 모습(고종의 외사촌 동생)
(출처: 위키백과)
2) 항일사적 편찬
또한, 선생은 여러 항일 사적을 편찬하였는데요. 이근주가 작성한 항일 사적으로 알려진 것은 「을미록(乙未錄)」, 「절의가(節義歌)」, 「화심주가(和心舟歌」, 「신년탄사(新年歎辭)」, 「태일자문답약초(泰一子問答略抄)」, 「사자구(四字句」 그리고 민영환과 이설에 대한 애도시 등이 있다. 홍주의병 과정을 기록한 「을미록」, 나라가 매군매국(賣君賣國)의 무리에 의해 더럽혀짐을 한탄한 「절의가」, 민영환 선생의 순국을 기린 혈죽시 등 여러 항일 기록들을 남겼습니다.
「태일자문답약초」는 그가 ‘태일자(泰一子)’란 가상의 벗과 대화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국망에 처하여 취할 길에 대하여 자문자답한 글이다. 글의 첫 머리에서 “오늘날 세상의 도가 끝났고 국사(國事)도 망극하여 근자에 소위 합방(合邦)이라는 하나의 문서가 있으니 그대는 들어서 아는가?”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1910년 8월 국망의 소식을 듣고 자결을 결심하기 직전에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 태일자는 “ (합방의 소식을 듣고서) 어찌 마음이 편안한가? ”라고 묻고 있다. 이에 이근주는 포의(布衣)로서 의를 취하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병마에 괴로워하다가 죽음을 취한 것이다”라고 할 것이니 이것이 원통하다고 하였다.
그는 나라가 망함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로 1)성인의 도가 막혔으며, 2)국운을 만회할 수 없으며, 3) 슬프고 분하며, 4)창피하고 부끄럽고, 5)듣기도 보기도 싫기 때문 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 다섯 중에 하나만 있어도 살 수 없는데, 그것들이 모두 겸해 있으니 구차하게 삶을 이어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 조선 총독부의 모습 (출처: Musty Room 블로그)
3) 자결 순국투쟁
1910년 8월 경술국치의 비보를 접한 이근주 선생은 “국운이 다하였으며 성인의 도가 끊어져 살아갈 마음이 없다. 일본한테 나라를 빼앗긴 것은 너무나 분통하고 부끄럽고 또 싫어서 죽을 수밖에 없다.”며, 자결을 결심하게 됩니다.
▲ 이근주 선생 묘소 사진
이후 1910년 9월, 이근주 선생은 큰형의 환갑이 지난 뒤 부모의 묘에 가서 제사를 올리고 자결ㆍ순국하였습니다.
1910년 국치의 비보를 접하고 그는 “나의 의(義)는 적도(賊徒)와는 함께 살 수 없다”라 하고, 대궐에 나아가 적신의 죄를 성토하려 했으나, 병이 심하여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자결로 항거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는 죽기로 결심한 것이 두렵지는 않았지만 세상 사람들의 평이 걱정이었다. 자신이 벼슬을 하지 않은 포의(布衣)로 자결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이 사람은 병마에 괴로워하다가 죽음을 취한 것이다.”라고 하여 자신의 처의관을 이해하지 못할 것을 염려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 자신의 처의관을 분명히 밝혔다. 성인의 도가 끊어지고, 국운이 다하였으니 살아갈 마음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너무나 분통하고 부끄럽고, 싫어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자고로 절개를 세우는 자는 그 죽어야 하는 의리를 잡으면 나가서 죽을 뿐입니다. 어찌 이름을 당시에 구하고 내세에 복을 구한 뒤에 죽겠습니까!라고 제나라 노중연의 고사를 들면서 국모의 원수를 갚고 임금의 치욕을 갚지 못함에 죽음으로써 의리를 잡을 뿐이라면서 자결의 뜻을 고했다. 그리고 나서 며칠 후 성묘하러 간다고 말하고 주과(酒果)를 준비하여 부모 묘에 제사를 지내고 자결, 순국하였다.
4) 순국의 의미
그의 죽음은 김복한이 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의로움을 취했으며 인을 이루었다(‘取義成仁’) 할 것이다. 그의 순국은 개인의 희생에 그치지 않고 후학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고 항일투쟁을 고취한 민족운동의 한 방략으로 후세에 기리 전해질 것이다.
독립기념관(관장 윤주경)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이근주를 2017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다음과 같이 개최한다
정부는 선생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 이근주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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