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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소개

동천 남상목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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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5-25 11:03 조회1,9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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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남상목

한 자

南相穆

이 명

南相睦

성 별

생년월일

1876.4.12.

사망년월일

1908.11.4.

본 적

경기도 광주 낙생(樂生) 판교(板橋) 190

주 소

경기(京畿) 용인(龍仁) 용천곡(龍泉谷)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0

훈 격

애국장


선생은 힘이 출중하여 장수가 될 재목으로 세인의 추앙을 받았다 한다. 선생은 1904년 고향인 경기도 낙생에서 벌어진 일제의 무단 수탈에 직접 항거하여 고초를 겪었다. 선생은 1906년부터 낙생·언주·대왕 돌마·용인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경기도 용인과 충북 충주를 아우르는 넓은 지역에서 무장한 의병 병력들을 이끌고 일본 경찰, 군인들과 전투를 벌였다.


일인들, 수목 마구 베고 노임 없이 조선인 강제 노동시켜. 격분한 선생, 일인 감독관 응징


남상목(南相穆, 1876.4.12 ~ 1908.11.4) 선생은 1876412(고종 13)에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하산운리(, 성남시 분당구 하산운동)에서 부친 진희(普熙)와 광주이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령이니, 시조인 밀직공(密直公) 군보(君甫)24세손이며, 부정공파(副正公派)에 해당한다. 호는 동천(東泉), 자는 문일(文一)이다. 선생은 가학으로 한학을 수학하여 경학은 물론 주역과 병서류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충과 효의 실행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선생의 나이 스물 아홉이던 19042월 일제는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 침략을 본격화하였다. 일본 각의에서는 그 일환으로 대한방침대한시설강령을 의결하였다. ‘대한시설강령의 제6항에 의하면 농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조선의 농업을 일본인에게 개방시킬 것을 계획하였다. 또한 이 시설강령에는 山林에 대한 조항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두만강 및 압록강안은 산림이 울창하다. 특히 후자는 그 면적도 넓고 운수도 편리하여 한국 재원 중에 굴지의 곳이다. 이 산림의 벌채권은 수년전 러시아인에게 주었지만 한국정부로 하여금 이를 폐기시켜 아방인으로 하여금 대신 이를 경영시킬 수단을 세우고, 한편으로는 적당한 장소를 선택하여 새로 식목하는 방도를 강구하도록 할 것. 일제는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의 산림 벌채권을 러시아로부터 이양 받아 이를 경영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와 같이 일제는 1904년 초부터 조선 영토를 강점할 계획을 세우고 내각에서 위와 같은 정책안을 결의하였다. 실제로 일제는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대장성의 관방장을 지낸 장삼등길랑(長森藤吉郞)19041월 조선에 파견하여 이른바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였음은 이미 밝혀진 바와 같다. 일제는 러시아와의 전쟁 수행을 위해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강제로 조선인의 인력과 재원을 수탈하였다. 선생이 29세 되던 해인 1904년 선생의 고향인 낙생면까지 일제의 수탈이 자행되었다. 그 해 5월경 일제는 낙생면 하운산리의 울창한 수목을 무기 자재로 사용하기 위하여 낙생면과 언주면, 돌마면 등 3개 면민을 동원하여 벌채한 것이다. 더욱이 주민들에게 이를 운반하는 작업을 시켜놓고 노임도 지불하지 않는 만행을 저지르자 선생은 일본인 감독관 나가이[中井]를 폭행하는 등 이에 항거하였다. 선생은 이 일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온갖 체형을 당하고 풀려났다. 이 사건은 선생이 항일의병을 일으키게 된 계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이 사건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국가의 외교권마저 빼앗기는 망국의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제의 침략 야욕 본격화되던 1906년 제천 의병장 이강년 의진에 들어가 항일전 참전


19077월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정미7조약이 체결되었다. 정미조약의 부수각서에 의해 81일에는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되었다. 일제의 한국군 해산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육군 1개 대대 이외의 모든 한국군을 무장해제하고 해산하였다. 구한국 군인들은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무장봉기하였다. 무장봉기는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육군 참령 박승환이 자결하면서 시작되었다. 1연대 제1대대 부대원들이 무기를 반납하고 훈련원으로 향하려고 문을 나가려는 때에 박승환의 자결 소식이 전해졌다. 부대원들은 무기고로 달려가 무기를 탈환하였다. 2연대 제1대대 역시 무기고를 부수고 총을 들었다. 시위대가 궐기하자 즉각 일본군의 공격이 있었다. 4시간에 걸친 남대문 일대에서의 전투 결과 한국군은 일본군 가지무라 대위를 비롯하여 다수를 사살하는 등 용감히 항전하였다. 시민들도 부상병을 치료하면서 전투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군인들은 탄약이 떨어지고 일본군의 우월한 화력에 밀려 7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대부분이 포로로 체포되었다. 일제는 서울의 시위대를 무력으로 해산한데 이어 지방 진위대도 해산하였다. 지방 진위대 해산은 83일 수원과 개성진위대를 시작으로 1개월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러나 서울 시위대의 항전 소식은 지방에도 전해졌다. 지방에서 먼저 봉기한 부대는 810일 해산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원주진위대였다. 대대장 대리 정위 김덕제와 특무정교 민긍호는 병사 250여명과 함께 봉기하여 원주관아와 경찰분서를 점령하고 원주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들은 충주에서 파견된 일본군 정찰대를 격퇴하였다. 이후 김덕제는 평창·강릉일대에서, 민긍호는 충주·죽산·여주 등지에서 항일의병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전과를 세웠다. 이강년은 고종의 퇴위에 자극 받아 의병을 일으킨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그는 723일 고종의 강제 양위 소식을 듣고 사당에 나가 결사보국을 맹세하고 종사 11명을 거느리고 제천의 배양산에서 의병을 재기하였다. 이때 그는 심상훈으로부터 짐의 한오라기 목숨은 애석할 바 없으나 오직 종사와 생령을 생각하니 애통하여 이에 선전 이강년으로 하여금 도체찰사를 삼아 7로로 보내노라(후략)”는 고종의 밀지를 받는다. 이강년은 거의하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국모를 시해하고, 임금을 욕보이고, 남의 정부를 핍박한죄를 성토하였다. 또한 그는 각국의 영사관에 일본의 신의 없음과 불법적 군사점령행위에 의병을 일으켰음을 통고하였다. 이강년은 제천일대에서 많은 전과를 수립하며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체포되어 19089월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선생이 언제 의병을 봉기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가 없어 이를 분명히 알 수 없다. 다만, ‘통고문에서 고향인 광주 일대에서 의병을 모아 활동하다가 이강년이 의병을 봉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19062월에 이강년 의진에 참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로 보아 1906년에 이미 의병을 봉기한 것으로 보이나 이강년 의진의 자료에 이 사실이 보이지는 않는다. 단지 선생의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된 김재선 등의 판결문에 따르면, 선생이 군대해산 후 의병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때인 19078월경 경기도 용인의 용천곡(龍泉谷) 일대에서 활동한 것은 확인된다. 이때 선생은 휘하에 50여명을 인솔하고 있었고, 무기도 구식총 40자루와 신식총 10자루를 갖춘 의병대의 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9078월 경기도 용인 용곡천 일대에서 총기로 무장한 50여명 병력 이끌고 의병장 활동


김재선은 해산군인으로 서울의 김태동 집에서 송주상·전경화·이시영 등과 신문을 열람하다가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는 소식을 접하고 이때에 나라의 형세가 병들고 쓰러져(萎靡) 가고 국권이 기울어져 가니 국민 된 자로서 잠잠히 보아 넘길 수 없다.”라 하고 이들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기로 결의하였다. 김재선 등은 서울을 출발하여 수원의 산성사(山城寺)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그곳에서 강춘선을 만나 의기가 투합되어 용인으로 가서 선생의 의병에 가입한 것이다. 이때 선생은 이들을 맞아 각각 직책을 부여하였다. 김재선(金在善)에게는 좌익장, 강춘선(姜春善)은 후군장, 송주상(宋柱祥)과 김태동(金泰東)은 종사, 김경화(金景化)와 이시영(李時永)은 포군으로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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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상목 등 판결문 (1908. 7. 13.)


경기도 용인부터 충북 충주까지 광범위한 활동 공간 배경으로 항일 투쟁


위 김재선 등의 판결문은 선생의 활동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선생은 19088월경에 김재선 등을 선생의 의병부대에 편입시켜 곧바로 전개된 음성전투에서 비록 패했지만 격전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김태동의 활동상을 말하면서 선생의 부대가 청안군(淸安郡, 현재의 괴산군 청안면) 못 미쳐 위치한 탄동(灘洞)’에서 일본군과 전투한 사실을 알려준다. 탄동은 충주의 탄동(충주 이류면 탄동)으로 보인다. 이로 보아 선생의 부대의 활동범위가 경기도 용인 일대에서 충북 충주 일대까지 펼쳐져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선생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김재선(金在善)은 음성전투에서 패한 후 잔병 30여 명과 같이 죽산의 칠정사(七亭寺)로 들어가 전봉규(全奉奎민병찬(閔丙贊) 등이 이끄는 의병대와 합류하여 안성전투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김재선은 전봉규·민병찬 의병한테 오히려 무기를 빼앗기고 그해 8월초()에 상경하였다가 19083()에 체포되어 10년 유형을 선고 받았다. 송주상(宋柱祥)은 패산한 뒤인 19077()에 김산(현재 김천)의 조상철(曺尙哲)을 찾아 갔다가 오는 길에 천안에서 의병(대장: )에 참여하였다가 곧바로 상경하여 은공(銀工)’의 일을 하다가 19083()에 피체되어 역시 10년 유형을 선고 받았다. 김태동(金泰東)은 충주의 탄동에서 선생의 의병대를 만나 활동하다가 상경하여 덕어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명동에 있는 한일인쇄사에 근무하던 중 19083()에 체포되어 10년 유형을 선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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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문형무소의 내부 모습                                    서대문형무소의 전경 모습


일본 헌병에게 체포돼 참혹한 고문 받고 서른 세 살 나이에 장파열로 옥중 순국


선생은 190811월 판교의 가족을 만나러 가던 중 밀고를 받고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느릿골에서 체포되었다. 선생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복역하던 중 참혹한 고문으로 장파열을 일으켜 1908114일에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고향인 청계산 아래 후천골에 가매장 되었다가 해방 후에 성남시 하산운동의 뒷내골선산에 안장되었으며,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이 추서된 후에 대전의 애국지사묘역에 부인 이순이 여사와 합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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