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5년~1945년, 독립군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 생애 및 활동사항
간도 연길에서 태어난 최운산장군은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유린한 일제의 만행에 맞서, 실형인 최진동장군, 친제인 치흥 선생과 함께 무력투쟁을 통한 국권회복에 목숨과 전 재산을 내어놓기로 결의하고, 1910년 만주 봉오동으로 이주하여 신한촌을 건설하고 무장독립투쟁을 위한 독립군 전진기지를 만들었다. 중국군에서 인솔하여 온 군인들과 애국청년들을 결집해 부대를 조직하고 봉오동사관학교를 설립한 후, 군사훈련과 민족정신을 함양하며 독자적인 무장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1919년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 수립으로 전 세계에 대한민국이 주권국가임을 선포한 것에 발맞춰, 최운산장군은 1912년부터 양성하여온 500여명에 이르는 자위대 ‘도독부’를 모체로 대한민국의 독립군부대 <군무도독부>를 창설하고 실형인 최진동장군을 사령관으로 추대하여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또한 자신의 소유지 왕청현 서대파를 <북로군정서>의 근거지로 제공하는 한편, 식량과 무기 등 군자금을 지원하여 <북로군정서> 창설을 주동하였다.
1920년에는 흩어져있는 북만의 독립군단체들을 통합하기 위해 무기와 군비를 책임지고 대한민국 독립군의 위상을 지닌 독립군연합부대, <북로독군부> 창설과 <사관연성소> 설립을 주도하였다.
봉오동전투에서 대패한 일제의 보복적인 경신학살로 봉오동의 가옥과 독립군기지는 파괴되고 가족들도 고초를 겪었으나, 최운산 장군과 형제들은 더욱 의연히 조국독립에 목숨을 바칠 것을 혈로써 맹세하였다. 또한 자유시참변으로 수많은 독립군 동지들을 잃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무장독립투쟁을 계속 전개하였다.
무술의 고단자로 비범한 사격술을 겸비하여 일본헌병대와 경찰서를 습격하고 친일매국노를 처단하고 군자금을 모연하며 비밀첩보작전을 이끌었으며 나자구, 대황구, 안산리, 도문대안, 우수리강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빛나는 활약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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