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명 | 안희제 | 한 자 | 安熙濟 |
이 명 |
| 성 별 | 남 |
생년월일 | 1885. 8. 4. | 사망년월일 | 1943. 8. 3. |
본 적 | 경상남도 의령 | ||
주 소 | 중국 영안현 | ||
운동계열 | 계몽운동 | ||
포상년도 | 1962 | 훈 격 | 독립장 |
지금 우리의 사회는 모든 일을 창조할 때이다. 계림팔도를 통하여 기성(旣成)의 인재를 찾는 것은 하늘에서 혜성을 찾는 것과도 같다. 이것은 마치 수명의 장공(匠工)을 갖고 수만간(數萬間)의 거택(巨宅)을 영조하려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인재 양성의 필요는 어느 시대와 어느 사회인들 급하지 않으리오만, 오늘날과 같이 급하고 절실한 때는 또 없다. 지역은 비록 작으나 국민은 2천만이다. 박옥잠룡(璞玉潛龍)이 어찌 없을쏘냐. 역사는 반만년이다. 국민을 교육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 어찌 급하다고 하지 않을 것인가. -1919년 11월 선생이 독립운동의 인재 양성을 위해 조직한 기미육영회의 취지문 중에서- |
“국가가 망해가는데 선비가 어디에 쓰일 것입니까”
안희제(安熙濟, 1885. 8. 4∼1943. 8. 3) 선생은 1885년 8월 4일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부친 안발(安?)과 모친 창녕 성씨(成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강진(康津), 호는 백산(白山)이다. 7살 때부터 선생은 향리에서 집안의 형인 안익제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매우 영민하여 문리를 쉽게 터득하였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그리하여 19세이던 1903년 7월 선생은 정석신 등 의령·합천·삼가·진주·하동 등지의 선비들과 지리산과 섬진강 일대를 유람하며 32수의 한시를 지어 <남유일록(南遊日錄)>에 남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 조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을 통하여 청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낸 뒤 러시아와 세력 각축을 벌이던 중,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을 도발하면서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시켜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러일전쟁 개전 직후인 그 해 2월 23일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의 체결을 강제함으로써 우리 영토를 점유하여 갔고, 또 8월 22일에는 <한일협약(韓日協約)>을 강제하여 고문(顧問)정치를 실시함으로써 내정간섭을 본격화하여 갔다. 나아가 일제는 러일전쟁 승전 직후 제국주의 열강의 양해 아래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자주적 외교권과 통치권을 장악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하기에 이르렀다. 조국이 이같이 망국의 위기에 처하자 선생은 신학문을 익힐 뜻을 집안 어른들에게 밝혔다.
“국가가 망해 가는데 선비가 어디에 쓰일 것입니까. 고서(古書)를 읽고 실행하지 않으면 도리어 무식자만 같지 못합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학문은 오히려 나라를 해치는 것이니, 내일 당장 경성으로 올라가 세상에 맞는 학문을 하여 국민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 가위 공맹(孔孟)의 도라 할 수 있는데, 어찌 산림간(山林間)에 숨어서 부질없이 글귀만 읽고 있겠습니까”
선생은 서울에서 신학문을 습득하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 그를 통해 국권회복을 달성하고 싶었다. 선생은 1905년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하였다가 다음에 양정의숙(養正義塾)으로 전학하여 전통 한학의 토대 위에 서양의 선진 학문을 접목하여 갔다. 이 때 선생은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족의 동량이 될 청소년의 교육이 급선무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을사늑약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한편에서는 즉각적 항일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장기적인 구상으로 각계각층에서 구국계몽운동을 펼쳐가던 당시 민족사회의 분위기와 그에 대한 선생의 자각이 크게 작용한 탓이었다.
교남교육회를 조직하여 민족교육운동
이같은 인식 아래 선생은 양정의숙에 재학 중이던 1907년 교남학우회(橋南學友會)를 조직하여 빈궁한 학생들에게 학비를 보급하고, 동·하기 방학 기간에는 순회강연을 통해 민중 계몽운동을 벌여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나아가 선생은 1908년 영남지방의 유지들과 교남교육회(橋南敎育會)를 조직하여 잡지 발행을 통해 민중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립학교 설립에 필요한 교육재원의 확보에 힘썼다. 그리하여 선생은 1907년에는 동래(東萊) 구포(龜浦)에 구명(龜明)학교와 의령에 의신(宜新)학교를 설립하였고, 1908년에는 자신의 향리인 입산리에 창남(?南)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과 민중 계몽운동을 실시함으로써 국권회복운동의 역량을 육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책략은 나날이 극악해져 갔다.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그 해 7월 19일 광무황제(고종)를 강박하여, “군국(軍國)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하게 한다”는 양위 조칙을 반포케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경운궁 중화전에서 신·구 황제가 참석하지도 않은 채 양위식을 거행하여 당시 반일구국운동의 정신적 지주이며 식민지화 정책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이어 일제는 이완용(李完用) 매국 내각으로 하여금 같은 해 7월 24일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체결케 한 뒤, 대한제국 정부의 각부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케 하여 이들로 하여금 국정을 분담케 하는 소위 차관정치(次官政治)를 자행하였다. 나아가 7월 31일에는 일제가 작성한 군대해산 조칙을 새 황제 순종(純宗)으로부터 재가 받는 형식을 취한 뒤,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을 강제하였다.
대동청년당을 결성하여 국권회복운동
이와 같이 선생은 일제의 한국 강점과 식민지 지배가 가시화 되는 상황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장기전략의 일환으로 1909년 10월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결성하였다. 선생을 비롯하여 서상일·김동삼 등 영남지역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17세부터 30세 미만의 청년들로 조직한 대동청년당은 8·15 해방 때까지도 그 실체가 발각되지 않은 독립운동 비밀결사였다. 이 단체는 1907년 4월 안창호·양기탁·김구 등 서북지역 인사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신민회(新民會)와 연계를 갖고 항일 민족의식을 결집하며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선생은 2대 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10년 양정의숙을 졸업하였지만 곧이어 조국이 일제의 완전 식민지로 전락하자, 선생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11년 봄 선생은 일본에 견학 간다는 소문을 퍼뜨려 일경의 관심을 돌려놓고는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안창호·이갑·신채호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만나 조국 광복의 방략을 논의한 뒤, 모스크바로 가 체류하면서 국제정세를 살피고 독립운동의 기회를 모색하였다. 그러다가 선생은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기지로 자리잡고 있던 만주로 나와 독립군 단체들을 역방하던 중,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귀국을 결심하였다.
선생이 귀국을 결심하게 된 동기는 제1차 세계대전에 따른 국제정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이를 이용하여 조국 독립을 달성하려 한 때문이었다. 또 그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내·외의 독립운동세력이 유기적인 정보 연락망을 갖추고,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조직망이 필요하다고 인식한 까닭이었다. 따라서 만주에서 국내로 잠입한 선생은 1914년 9월 청진을 거쳐 해로로 부산에 도착한 뒤, 즉시 그 같은 계획의 실행작업에 착수하였다.
백산상회 설립해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키워
선생이 생각해 낸 구체적 실행 방안은 상회의 설립이었다. 그것은 선생이 표면적으로는 상회의 상업활동을 통해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하고, 비밀리에 국내·외 독립운동세력과의 연락망을 구축하여 각종의 정보와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려는 의도였다. 따라서 선생은 가산을 정리하여 자금을 마련한 뒤, 동지들을 포섭하여 1914년 말경 부산 중앙동에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또 1916년경부터는 서울·대구·안동·원산·봉천 등지에 백산상회의 지점과 연락사무소를 설치하여 활동지역을 확대하였다. 그 가운데 대구 연락사무소는 태궁상회(太弓商會)를 경영하는 서상일, 서울 사무소는 미곡상 이수영, 봉천 연락사무소는 해천상회(海天商會)를 경영하는 이해천이 맡아 독립운동 관련 정보와 자금을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이 시기 대한광복회도 총사령 박상진이 대구에 설립한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본거지로 하여 영주·인천·삼척·광주·연기·용천 등 국내, 만주 안동의 삼달양행(三達洋行)과 장춘의 상원양행(尙元洋行) 등 국외에 곡물상점을 설립 경영하면서 군자금을 마련하고, 그 상업 조직망을 독립운동 정보·연락망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과 박상진은 양정의숙 동창으로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조직망과 백산상회의 조직망도 상호 보완적 관계에서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상하이 신한청년당도, 동경 유학생 조직도 국내로 들어오면 백산상회로 찾아와
그렇기 때문에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거족적인 독립운동의 봉기를 촉구하기 위해 상하이 신한청년당이 국내에 파견한 밀사 김순애가 찾은 곳도, 그리고 동경 2·8학생독립운동을 국내에 전파하기 위해 김마리아가 찾은 곳도 백산상회였다. 따라서 백산상회는 해외 독립운동세력의 국내 연락 거점임과 동시에 독립운동 전파소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며 3.1운동의 추진과 발발에도 기여하였다.
3.1운동이 발발하자 선생은 집안의 조카인 안준상을 시켜 고향인 의령의 산중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영남의 각지에 배포케 함으로써 만세시위운동의 전파에도 힘썼다. 특히 1919년 11월 선생은 백산상회의 관계자 및 영남 유지들과 더불어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결성하였다. 이 회는 우수한 청소년을 선발하여 국내·외에 유학시켜 조국 광복과 민족국가 건설의 인재로 육성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와 함께 선생은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수시로 전달함으로써 임정의 재정과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동아일보 창립 참여, 중외일보 발행인으로 항일 언론투쟁
1920년대에 들어와 선생은 한말 계몽운동의 연계선상에서 언론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0년 4월 동아일보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 부산지국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선생은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를 1926년 동지들과 함께 인수하여 중외일보로 명의를 변경하여 발행하였다.
이 때부터 1931년 6월 종간할 때까지 선생은 중외일보에서 사장, 발행인 겸 편집인 등으로 활동하면서 잦은 압수와 정간처분 등 일제의 언론 탄압에도 불구하고 젊은 기자들과 편집진의 항일 언론투쟁을 지원하였다. 때문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도 중외일보를 이렇게 평가했다.
“일반적으로 그 논조는 총독부의 시정을 비난, 공격하고 세계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을 빙자하여 조선이 독립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풍자하고, 매사를 편견과 중상을 바탕으로 한 집필을 강행함으로써 멋모르는 민중으로 하여금 총독정치를 오해하게 하였다.”중외일보의 항일 언론활동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겠다. 다른 한편으로 선생은 수시로 중국 만주지역을 여행하면서 독립운동자들과 조국 광복의 방략을 논의하고, 그 실천방안을 강구하였다. 그러다가 1920년 12월 선생은 북경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만나고 돌아오던 중, 신의주에서 일경에 피체되어 27일 간의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선생은 새로운 독립운동 근거지를 개척할 구상을 갖고, 일경의 감시를 피해 1926년 9월부터 12월까지 4개월 동안 동만주 일대를 답사하기도 하였다.
발해농장을 설립하고, 독립투쟁 기반 마련
선생은 독립운동의 근거지 개척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국내에서의 사업을 서서히 정리하는 한편, 1931년 10월에는 단군을 신봉하는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조국 독립에 헌신할 마음가짐을 굳건히 다졌다. 그런 다음 선생은 발해의 고도인 만주 동경성 일대에 토지를 구입하여 1933년 발해농장(渤海農場)을 설립,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발해농장 설립의 목적은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주로 이주한 한국 농민들을 정착시켜 자작농으로 육성함으로써 독립투쟁의 인적·물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만주 영안현 동경성 일대의 광활한 토지를 구입하여 수로를 개설하고, 여기에 한국 농민 3백여 호를 유치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5개년 연부 상환의 조건으로 토지를 분배하여 경작하게 함으로써 자작농으로 육성하여 갔다. 또한 이주 농민들과 그들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농장지역에 발해보통학교를 설립하고, 선생이 교장을 맡아 민족교육을 실시하면서 항일 독립정신을 고취하여 갔다.
임오교변 때 체포되어 고문으로 순국
아울러 1934년 대종교 3세 교주 윤세복을 비롯한 간부들과 대종교 총본사가 발해농장 지역인 동경성으로 옮겨오자, 선생은 교무행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활발한 포교활동을 벌여 갔다. 그것은 선생이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통해 발해농장 한인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또 종교적 일체감을 조성하여 유사시에 조국 광복의 역군으로 삼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선생을 비롯한 대종교 지도부의 활동으로 점차적으로 교세가 확대되고, 교도들의 항일 민족의식이 고조되어 독립운동세력으로 발전하여 가자 일제는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더구나 일제는 1938년 7월 중일전쟁과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연합군측과 힘겨운 전쟁을 벌이던 중이었기 때문에 그 위협의 무게는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일제는 1942년 11월 19일 교주 윤세복을 비롯한 21명의 국내외 대종교 지도자들을 일제히 검거하여 대종교의 민족운동을 탄압하였다. 이것이 임오교변이다.
이 날 선생 또한 신병 치료 차 귀향해 있던 중, 일경에게 피체되어 만주 목단강성 경무청으로 이송 수감되었다. 여기에서 선생은 일경으로부터 9개월간의 혹독한 고문과 회유를 받았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선생은 1943년 8월 3일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병 보석으로 출감한지 3시간 만에 목단강성 영제의원에서 순국하셨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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