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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소개

신건식(申建植)오건해(吳健海)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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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1-15 10:49 조회1,9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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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건식 1889. 02. 13 ~ 1963. 12. 08   충북 청원

     오건해 1894. 02.29  ~ 1963. 12. 25  충북 

● 신건식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오건해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

1912년 동제사 및 대동보국단 활동

     1939년 제 31회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 의원

     1941년 임정재무부원

     1943?년 3월 임시정부재무부 차장으로 활동


신건식,오건해 부부는 그들 자신이 독립운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신순호와 사위 박영준, 형 신규식과 조카 신형호   (큰형 정식의 아들), 사돈 박찬익이 모두 독립운동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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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진, 왼쪽부터 오건해, 딸 신순호 신건식 선생 (출처: 독립기념관)

 


1889년 충북 청원군에서 태어난 신건식 선생은 형 신규식 선생을 따라 1911년 상해로 망명하였고 항저우에 있는 저장성 의약전문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였습니다.

 

1912년 공부를 마친 선생은 형 규식이 박은식 등과 함께 만든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 대동보국단(大東報國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저장성 육군형무소 군의관 및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 외과주임으로 근무하며 난징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와 학생들의 숙식 경비를 지원했습니다.

 

1939년 제31회 의정원회의에서 충청도의원으로 당선되며 신건식 선생은 본격적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했습니다. 임시정부의 군대인 한국광복군의 지휘권을 중국 정부로부터 되찾는 일에 기여했으며, 1943년 임시정부 재무부 차장으로 선임되어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일에 힘썼습니다.


오건해 선생 

오건해 선생은 1926년 경 남편 신건식 선생이 있는 중국으로 이주하였고,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에 힘썼습니다.

 

특히, 1938년에는 남목청사건으로 총상을 입은 김구 선생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여 회복시켰습니다.

 

아울러, 1940년 한국혁명여성동맹 설립을 주도하고 1942년 한국독립당 활동에 의욕적으로 참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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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 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독립운동 명문가문을 이루다

 

신건식, 오건해 선생은 그들 자신이 독립운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딸 신순호와 사위 박영준, 형 신규식과 조카 신형호, 사돈 박찬익이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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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건식과 사돈 박찬익 / 딸 신순호와 사위 박영준 (출처: 독립기념관)

  그녀는 임시정부의 안살림과 독립운동가들의 수발을 드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사위 박영준은 장모를 "독립운동가치고 오건해 여사의 음식을 먹어 보지 못한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는 말이 있을정도로 음식 솜씨가 좋은 오건해 여사 는 독립운동가의 뒷바라지에 평생을 보낸 분 "으로 회고하였다. 1937년경에는 병약해진 이동년의 병환 치료에 정성을 다했고, 만주에 가족을 두고 홀로 충칭 으로 와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은 박찬익의 뒷바라지에도 힘썼다.  가족이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대한민국의 진정한 '명문가문'을 이룬 신건식, 오건해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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